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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과 제이드 / 오윤희

2025-04-13조회 11

작성자
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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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여성들, 시대가 만든 명백한 피해자
오윤희 작가의 <영숙과 제이드>를 읽고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지은 듯한 제목의 <영숙과 제이드>, 처음엔 아주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가 2024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기대되는 한국 여성 작가의 등장"으로 주목받은 장편소설이라는 수식어에 기대감이 상승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예사롭지 않은 소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연히 집어 들어 빨려 들어가듯 한달음에 읽었다'라는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의 추천사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 역시 제이드와 영숙 사이에 숨겨진 비밀이 궁금해서 새벽까지 책을 덮지 못하고 하루 만에 다 읽어냈다.

소설의 초반에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민 2세 제이드의 시선을 중으로, 후반부에는 제이드와 영숙의 시선이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엄마의 죽음 이후 엄마의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상자에서 엄마와 낯선 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 제이드. 그 사진 속 남자를 찾게 되면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 비밀스럽고 어두운 삶의 실타래가 풀릴거라고 생각한다. 제이드는 사진 뒷면에 적혀 있는, 그 남자가 사는 곳으로 추측되는 주소로 찾아가 보기로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삶

제이드는 평생 '엄마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폭력적이고 알콜 중독에 외도를 일삼는 남편에게 화 한번 내지 않았던 엄마, 심지어 엄마를 버리고 떠났다가 병들어 다시 돌아온 아버지를 말없이 받아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미국에서 40년 이상을 살면서 그 누구와도 친분을 쌓지 않았다. 보통의 이민자들은 한인 교회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고향 이야기를 나누며 향수를 달래곤 하는데, 엄마는 한국인들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타인과 사이에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벽을 쳐 놓은 채 철저히 혼자로 지냈다. 엄마의 유일한 낙은 제이드에게 정성스러운 한국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가슴 아픈 과거

전쟁 이후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부잣집 식모살이를 하던 제이드의 엄마 영숙은 주인집 아들에게 겁탈을 당한다.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영숙은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을 믿고 마마라는 여자를 따라간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월급을 많이 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영숙이 도착한 곳은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기지촌이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붙잡혀 돌아와 죽기 직전까지 폭행을 당한다. 그곳에서 '제인 에어'를 좋아하고 영문학도를 꿈꾸던 경아를 만나 우정을 나누지만, 성병 치료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페니실린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친구 경아마저 잃게 된다. 경아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제이드'라는 보석이 박힌 반지를 영숙에게 건넨다. 영숙은 딸을 낳게 되면 '제이드'라고 이름 짓기로 결심한다.

기지촌 여성들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빚을 갚아주고 미국으로 데려가 줄 미군을 만나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영숙은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존'이라는 미군을 만나 기지촌에서 탈출하고 기지촌 근처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살림을 차린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했었다는 사실을 동생 영호에게 들키고 만다. 그리고 영숙은 가족들에게서 철저히 버림받는다. 영숙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가족들은 영숙을 수치스러워한다.

제이드는 엄마의 옷장 속에서 찾아낸 사진 속 주인공이 엄마의 동생이고, 그가 엄마의 도움으로 초청 이민을 와서 미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누이를 이용했을 뿐 감정의 회복 없이 끝까지 차갑게 외면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엄마는 홀로 외롭게 죽어갔다.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숨죽여 살았던 기지촌 여성 모두는 시대가, 상황이 만든 명백한 피해자였다.
 
"그런데 왜 엄마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었죠? 버림받은 건가요? 하지만 그건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잖아요."
"누구의 잘못이라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여자의 순결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누이 같은 사람은 집안의 수치였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가족을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이 사진을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을 거고요.
가족이라면 결점과 허물도 다 이해하고 감싸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269쪽)
 
자신의 과거 때문에 평생 존재감 없이 유령처럼 살아왔던 엄마 영숙에게 딸 제이드는 '상처투성이 인생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영롱한 빛을 발한 보석'(284쪽) 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할퀴고 간 수많은 상처 속에서 반짝이는 제이드를 만난 덕분에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제이드는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는 엄마를 '타락한 여자'라고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엄마를 '피해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엄마의 진짜 이름은 불친절한 운명과 용감히 싸운 '생존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소설가이자 기자인 오윤희 작가는 국내외 곳곳을 오가며 여러 사건과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하던 중 우연히 읽게 된 한 재미교포의 책에서 역사가 외면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접한 후 이 책 <영숙과 제이드>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써 내려간 르포형 소설이기에 그 당시 그 사건과 장면들이 선명하게 그려져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허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탄탄하게 구성된 전개 방식은 소설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가슴 아팠던 점은 많은 여성들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던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점이었다. 가엾은 피해자이면서 역사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선이 아닌 정절을 지키지 못한 부도덕한 여성으로 치부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었고,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안타까운 여성들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불편하고 힘겹더라도 왜곡된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이름이 함부로 전시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름이 가볍게 거론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름이 의미 없이 호명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름이 흔적 없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